집 성 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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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성촌(集成村) |
가.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산동 "내동마을"
송계공(松溪公)께서 터를 잡으시고 뿌리를 내리심으로 인하여 후손(後孫)들의 집성촌이 된 송산동 '내동마을'은 나주오씨 선계족보에 나오는 옛날의 '광산촌'을 말하는데, 마을 앞이 넓어 '광산리' 혹은 '너부메'라고 하였다.
동쪽의 어등산(魚登山), 서쪽의 사랑산(獅狼山), 남쪽의 복룡산(伏龍山), 북쪽의 용진산(聳珍山)의 한 중심부에 위치해 있는 이 마을은 바로 앞에 맑은 하천이 유유히 흐르고 있고 하천 위 에는 광활한 농경지로 향하는 약 20여 미터에 달하는 아름다운 무지게형(홍교) 목조다리까지 있어(지금은 현대식 교량으로 교체됐음) 배산임수(背山臨水) 말그데로였는데, 15세기말 한양에 거주하시던 송계공의 백부(伯父)이신 조선 선조 때의 우의정(右議政)을 지내신 명관 금양군(錦陽君)께서 이곳으로 낙향하시어 조카 송계공을 근처에 두고 사셨다고 전해지고 있다. (마을 어귀에 솟대가, 마을 앞에는 하마비가 있었음)
마을 뒤 옛 삼현사(三賢祠)에 광산사(廣山祠)가 있어 오겸(吳謙)을 배향(配享)하고 있고, 마을 앞 산정(山頂)에는 수령 450여 년 쯤으로 추정되는 3그루의 거목(巨木)과 구곡천(九曲川)의 맑은 물을 앞에 두고 '관수정(觀水亭)이라는 정자가 세워져 있는바, 물에 관한 여러 가지 의미를 포함한 이름의 이 관수정은 송계공의 증손인 광산재 응석(應錫)이 1600년대 말쯤에 창건하여 학동들의 여름철 글공부 장으로, 또는 마음속의 옛 친구들을 불러 모아 세상을 논하고 시(詩)를 읊는 장으로, 좌경우사(左經右史) 많은 서책을 펴내고 옛 성현의 자취를 더듬어 보는 유유자적(悠悠自適)의 청고(淸高)한 생활 장으로 사용하시면서 '관수정 원운(觀水亭 原韻)' 등 많은 시와 글을 지으셨다.
나. 장성군 삼계면 덕산리 "이암마을“
이 마을은 뒤로 '수련산(水蓮山)'이라는 명산(名山)이 웅장(雄壯)하게 뻗어 있고 마을 앞에는 특이(特異)하게도 사람의 귀(耳)를 닮은 우람한 바위 둘이 양쪽에 우뚝 서 있어 '이암(耳岩)마을'이라 불리고 있는바, 송계공의 4세 대후(大垕)조께서 1700년 초쯤 이곳에 터를 잡아 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비아동에서 이거(移居)하심으로써 송계공파 이암문중의 집성촌(集成村)이 되었다.
이암문중(耳岩門中)은 나주오씨 8世이신 송계공(松溪公)의 2世 휘(諱) 이한(以漢, 절충장군)의 후손들로 대법관 소계(小溪) 오필선(吳弼善)을 위시하여 외무고시 1명과 사법고시 2명(현 변호사)을 배출하는 등 이 지방의 명문가(名文家)로 불리고 있는바, 이는 수연산의 장골이라는 명당에 송계공의 7世 휘(諱) 상택(相宅)을 모신이레 명당발복(明堂發福)이 되고 있다는 말이 전해지기도 한다. 제 이암문중(耳岩門中)의 소계(小溪) 오필선(吳弼善)께서는 이 마을에 계산재(溪山齋)라 명명한 제실(祭室)을 세우시고 음력(陰曆) 10월 18일에 조상시제(祖上時祭)를 모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