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계 공
home > 송 계 공
|
▣ 송계공(松溪公) 휘(諱) 언인(彦仁) |
나주(금성)오씨대종보 2010년 제11호 45면/오병휘(吳炳暉) 글 인용
※ 함평 이종택의 송계공 묘갈명 인용
7世 휘(諱) 원(謜, 호조참의, 서윤공)의 아홉 분의 아드님 중 다섯 번째로 태어나시고, 우의정 금양군(錦陽君) 휘(諱) 겸(謙)의 친조카이시기도 한 8世 송계공의 이름은 언인(彦仁)이요 자(字)는 득량(得良)이며 송계(松溪)는 자호(自號)이신바, 선조 7년 계유(癸酉 1573년) 3월 3일에 출생하여 인조 23년 을유(乙酉 1645년) 8월 8일에 향년 73세로 작고하심으로 나주의 삼도면 도덕리 백양동 곤향(坤向)의 원(原)에 모셔졌다.
공(公)은 타고난 성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며 도량(度量)이 너그럽고 커 조금도 진애(塵埃) 의 기(氣)가 없었다. 공의 나이 10세에 문학의 소견이 트여 차츰 경전(經典)과 여러 글들을 통하니 백부(伯父)이신 금양군께서 기특하게 여기시고 사랑하며 "이 아이가 우리 가문을 창대 (昌大)케 할 것이니 나는 걱정이 없다"고 하셨으며, 학문이 이미 이뤄진 후 찾은 금강(錦江) 기효연(奇孝演) 선생으로 부터 경전의 깊은 뜻 질문에 공이 응답하기를 척척하니 심히 가상하게 여겼다.
공은 소시(少時)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양친(兩親)의 병환(病患) 중에 탕제(湯劑) 달이는 일을 결코 남에게 맡기지 않았으며, 상(喪)을 당하여서도 예절을 다하는 등 정(情)과 문(文)이 지극 하였다.
부친의 유명(遺命)에 따라 한번 과거에 응시하여 반관(泮館)에 오르심으로 청음(淸陰) 김상헌 선생이 벼슬을 권하였으나 고향으로 돌아와 글과 술, 꽃과 돌로 벗을 삼고 은거(隱居)하니 남도의 사우들이 경복(驚服)하였고, 김청음. 정기옹. 고청사 등 여러 선생들도 "강절(康節)의 도(道)가 여기에 있다" 하는 칭송을 하게 된다.
공의 청고(淸高)한 이름이 널리 알려져 벼슬을 부름에 낮은 관직인 혜민서(惠民署) 참봉(參奉)으로 임명을 받고 봉직(奉職)하시다가 노령이 되어 혜민서(惠民署) 직소(直所)에서 작고하시자 혜민서에서 호상(護喪)을 맡았고 반구(返柩)를 하는 날에 반관(泮館)의 선비들과 관료들이 슬퍼한바 높지 않은 관직으로 이러한 대우를 받았음은 공의 인품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공의 배위(配位)는 의인(宜人) 죽산박씨(竹山朴氏)로 사침(思忱)의 따님이시며, 희중(希中). 희설(希契), 희진(希進) 등 3남과 사위 이성국(李成國)과 김백일(金百鎰) 등 2녀를 두셨으며, 모친은 숙부인(淑夫人) 창원정씨(昌原丁氏)다.
공의 묘비(墓碑)는 공의 9세손 정규가 주간하여 건립하였고, 묘갈명은 함평 이종택이 공의 가장(家狀)을 살펴보고 명(銘)한바 "4척 높이의 무덤에 천고(千古)의 칭송(稱誦) 비석이 크다"고 하였다.